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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그리는 레핀의 후예, 임장수 화백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 한국인 유학생 1기 임장수 화백







[476호] 2011년 11월 07일 (월) 양미나 기자/MC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 한국인 유학생 1기
‘대작’, 화가 임장수가 짊어진 삶의 무게
잊혀져가는 한국의 정취를 담아내는 화가










  
 


 옅은 녹색의 커튼을 젖히고 들어선 화실에서 은빛 머리에 수염이 멋진 노년의 신사를 만날 수 있었다. 군데군데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입고 이젤 앞에 서서, 강하면서도 여유롭게 붓을 움직이는 모습에 지나간 세월이 투영되는 것 같았다. 거침없이 내려가는 붓끝에서부터 척박한 대한민국 미술계에서 오롯이 그림만 보며 살아온 강단이 느껴졌다.
임장수 화백은 서라벌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의 레핀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임장수 화백은 레핀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임과 동시에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 학생이기도 했다. 학동에 위치한 임 화백의 화실에는 상당한 크기의 레핀 카피가 발 딛을 수 없을 만큼 가득하다. 레핀의 그림을 정확히 묘사한 능력에 한 번 감탄하고, 자신의 키보다도 높은 크기의 대작을 셀 수 없이 많이 그려왔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임 화백을 만난 연세중앙교회에 걸려 있는 100호 크기의 대형 그림은 임 화백이 교회에 기증한 그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임장수 화백의 그림을 모아 엮은 ‘한국의 미’라는 화집은 대학교제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한국을 그리는 레핀의 후예, 임장수 화백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 한국인 유학생 1기


임장수 화백은 특별활동을 통한 예술인 육성으로 유명한 서라벌 예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임 화백은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서라벌 예고에 들어가면서 처음 붓을 잡게 된 것이다.
임 화백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유학시절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 화백은 우연히 러시아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타국 유학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쩌면 임 화백이 레핀 아카데미와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어느 날, 임 화백은 레핀 아카데미가 미술로 유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무언가 이끄는 듯한 느낌을 따라서 찾아가 보기로 결심한 임 화백은 주변의 도움으로 혼자 레핀 아카데미를 견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감명 받은 그는 바로 입학을 결심했다.








   
 

임 화백의 젊은 시절 당시, 러시아에 유학하는 한국인이 많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레핀 아카데미에 들어간 한국 학생은 임장수 화백이 유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레핀 아카데미가 처음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학생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임 화백은 “360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에서 실존하는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잘 알려진 밀리코프의 제자로 들어가 특별대우를 받았다. 작업실 등도 제공받으면서 정말 꿈에 그리던 학교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다시 한 번 레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지금도 나는 매년 러시아를 방문한다. 1기 유학생으로서 매년 한국 학생들 5-60명 정도가 후배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너무 흐뭇하다.”며 레핀 아카데미와의 인연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


‘대작’, 화가 임장수가 짊어진 삶의 무게


평소 큰 작품을 그리기로 유명한 임장수 화백의 화실에는 미처 다 걸지 못해 차곡차곡 포개어 정리해 놓은 대작들도 상당수다. 임 화백은 평소 작은 크기의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니, “좀 더 나이를 먹게 되면 힘이 없어 큰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못 그리게 될 테니까 이렇게 힘쓸 수 있을 때 그리자는 마음도 있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약 160cm에 높이 역시 130cm가량 되는 100호짜리 그림을 1년에 한 점 그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한데도 임 화백은 빠른 속도로 그리는 편이다. 그만큼 그림을 그리는 데에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대작 하나에 몰두하면 그림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 “올해는 교회에서 대작을 그렸다. 사실 한국에서는 대작을 그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교회에서 화실을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이 정도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쌓여가는 작품들을 보면 정말 흐뭇하다. 두고두고 남겨놓을 작품들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 기쁘다.”는 임 화백의 말에서 그림에 대한 애착과 그림을 그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임장수 화백이 그린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 뱃사람들'

임장수 화백의 학동 화실에는 훨씬 많은 그림이 있다. 화실로 들어서는 계단에까지 쌓여있는 작품들 덕에 그 수를 모두 세는 일 역시 쉽지 않다. 때문에 요청받은 그림을 찾는 것 보다는 다시 그려주는 경우가 더 빠르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내 그림은 팔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다. 파는 데 주력했다면 이만큼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외국을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외를 다니면서 골동품도 많이 모아왔는데, 향후 개인 미술관을 열고 싶어서다. 여러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미술관을 세워주겠다는 연락이 많이 와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나의 그림을 위한 공간에 대한 나름의 욕심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나 편안하게 나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임 화백의 목소리에서 척박한 한국 미술계에서 오롯이 살아온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레핀의 카피, 그리고 한국 미술의 현실








  
 임장수 화백이 그린 레핀의 종교화


임장수 화백의 대작 중에는 레핀의 카피가 많다. 원작과 비교했을 때 놀랄 만큼 정교하게 카피한 그의 그림 속에는 예수의 모습부터 고된 삶을 살았던 러시아 서민들의 모습까지 들어있다. 레핀은 러시아의 대표적 작가로 그의 이름을 딴 레핀 아카데미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명성이 높은 아카데미다. 일례로 명화의 파손이 생기면 레핀 아카데미에서 복원 작업을 거치게 된다. 학교 앞에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가 언제나 학생들을 위해 무료 개방되어 있다. 그들에게 카피란 모방이 아닌 반드시 거쳐야 할 공부 과정 중 하나다. 사실, 중세 유럽에서는 카피를 얼마나 잘 하는지가 그 작가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카피는 유럽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임 화백은 “한국에서는 카피가 모방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좋지 않은 어감을 가지고 있지만 카피도 하나의 공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임장수 화백이 레핀 미술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한국에서 미술을 공부한대로 연필 소묘를 했고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3~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며칠을 그것만 반복했다. “지치고 힘들어서 내 능력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더 그리라고 했다. 같은 그림을 얼마나 그렸는지 모른다. 내가 이걸 배우러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나중에 알고 난 사실인데 최하 한 달은 연필만 쥐고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땀구멍 하나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던 친구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피라미드 형태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기를 겪고 나면 미술가로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탄탄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면 정부에서 화구, 화실, 아파트까지 모두 지원해 준다. 작가로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시스템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예술가들의 삶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보장 시스템은커녕 그림을 그릴 여건이나마 갖춘 곳이 대학 강의실, 미술학원, 문화센터 정도이다. 그만큼 지도자들의 수입 역시 넉넉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훌륭한 작가가 태어나기 힘든 것이 한국 미술계의 현 주소이다. 그림을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고, 작업실도 여의치 않아 실력이 있어도 그림을 그리기가 힘든 것이다. 임 화백은 “나의 경우는 개인 화실에서 구애받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나가고 있는 편이다. 큰 작품만 그리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3m 높이의 캔버스에 작업하기란 공간이 여의치 않아 힘들다.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꿈이 있어도 펼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술가들을 위해 정부, 기업 차원에서의 지원 등이 필요한 시점이다.”라며 안타까운 현실을 토로했다.










   
 연세중앙교회에 기증된 임장수 화백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잊혀져가는 한국의 정취를 담아내는 화가


임장수 화백의 그림의 강렬함은 레핀의 것을 닮아있지만 그가 정말 그리고 싶은 것, 그리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조국, 한국이다. 풍경화를 주로 그리고는 했던 임 화백이었지만 근래에 들어 그가 그린 작품들은 소싸움, 말 그림, 사람 등 다양한 한국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러시아 유학 전 그의 유년기가 녹아 있는 한국의 옛 풍경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림에 옮겨 담는다는 그에게 현대 물결에 밀려 구경하기 힘들어진 우리의 옛 것이 모두 그림의 소재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임 화백은 “모든 작품이 내 자신과도 같아 애착이 간다. 하지만 한 편으로 어떻게 생각해보면 흡족할 만큼 만족스러운 작품도 없다. 늘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완성하고 보며 그리는 순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후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한 번 더 나를 발전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대학의 교재로도 많이 쓰이고 있는 임장수 화백의 화집 ‘한국의 미’를 보고 있자면 소 끄는 아이의 맑은 눈과 새참을 이고 가는 어머니의 정성, 지게를 진 아버지의 어깨와 풍악의 즐거움까지 우리 민족의 정취가 한껏 느껴진다. 지금도 임 화백의 화실에서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을 한국의 모습이 그를 닮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날이 빨리 오기 바란다.


<양미나 기자> ymina@journal.com